<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에 서술된 사산조 페르시아의 동방기독교 탄압 책에 관한 여러 잡다한 것들

... 그러나 샤푸르 2세의 치세(309-379)에 기독교도들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12년에 기독교도로의 개종을 선언하고 이어서 324년에는 동서로 분열되어 있던

제국의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중략) 콘스탄티누스는 샤푸르에게 페르시아 영내에 있는 기독교도

들에 대한 보호와 선처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로마는 그의 적국이었기 때문에 샤푸르는 자연히 

영내의 기독교도들이 혹시 적국과 내통하지 않을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의심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이었다. 318년경부터 시작된 박해는 처음에는 부분적이었지만, 339년 이후에는 전면적인

형태로 확대되었다. (중략)

샤푸르는 처음에 기독교도들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대신 세금을 두 배로 내라는 칙령을 발표했고, 이어서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라는 압력도 가해졌다. 본격적인 박해는 수사에서 시작되었다. 2주일간 계속된 무차별

학살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죽음을 당했고, 이것은 곧 다른 도시로도 확대되었더. 한 교회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의 수만 1만6천 명이었다고 하니, 실제로 죽은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박해는 379년에 샤푸르 2세가 죽은 뒤 비로소 멈추었고 그 후 약 40년간 기독교도들은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들의 수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시 찾아온 안정과 함께 교세는 빠른 속도로 팽창해갔고 메소포타

미아는 물론 이란 각지에도 교구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 느끼는 불안감도 증

폭되어갔고, 결국 420년 바람 5세가 즉위하면서 더욱 혹독한 박해를 낳게 된 것이다. 사람의 살껍질을 벗겨서 죽

였다, 손발을 묶고 쥐들이 득실거리는 구덩이 속에 던졌다. 몸을 토막내어 죽였다는 등 듣기에도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었다. 바람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야즈데게르드의 시대에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446년에 바그다드에서

북방으로 220킬로미터 떨어진 돗에 있는 카르카라는 곳에 열 명의 주교와 15만3천 명의 신도들이 학살되었다.

오늘날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가 그곳에 해당되는데, 지금도 도시 외곽에 있는 언덕이 붉은색을 띠는 것은 당시

순교당한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이며, 지금도 그 곳의 기독교도들은 매년 9월 25일에 모여

그 날을 기념하고 있더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박해 속에서도 사산 왕조 영내의 기독교는 명맥을 유지했도 오히

려 박해를 피해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더 외곽지역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 103 ~ 104P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도 엄청났지만 한 번에 15만 3천명을 학살한 사례가 있고 참수와 교형 정도인 조선의 박

해에 비해 살껍질을 벗겨내는등의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하는 등 사산조 페르시아의 기독교 박해는 그 규모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 박해속에서도 끝까지 동방기독교가 절멸하지 않은걸 보면 믿음이라는게 얼마나 굳센것인

지를 실감하게 한다.

그러고 보니 콘스탄티누스의 호의는 오히려 큰 폐를 끼친것으로 돌아갔다. (...) 물론 이 편지외에도 박해의 원인

은 여러가지 겠지만 나름의 호의가 오히려 독이 되는 사례를 또 다시 보게되 씁쓸하다.

덧글

  • 들꽃향기 2010/05/20 12:39 # 답글

    저도 역시 콘스탄티누스의 호의는 오히려 긁어부스럼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_=;; 적어도 페르시아 황제가 로마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어 그래. 보호해줄게.'해도 자국민들에게는 모양새가 우습게 되지 않습니까..=_=;;

    아니면 콘스탄티누스가 페르시아 사회의 분열을 일부러 노리고 한 짓이었을까요...(...)
  • 위장효과 2010/05/20 13:03 #

    분열이라고 한다면...루이 14세가 한 대표적 삽질인 낭트 칙령 폐지후 프랑스 사회가 입은 타격과 유사한 영향이 페르시아 내에서 퍼지길 기대한 것인지도요. 그냥 낭트 칙령 폐지후 위그노 이탈...이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아주 의외의 분야에서도 상당한 인력유출을 경험했더군요.
    게다가 헤지라 이후 두 양대 제국이 모두 이슬람교도들에게 발리게 된 데에는 동방기독교도-네스토리우스파에 후기 단성론자들-의 협력이 큰 역할을 했답니다. 단성론 문제라면 동로마제국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문에 일이 커졌었으니...
  • 들꽃향기 2010/05/20 13:06 #

    위장효과님// 저 역시 두 양대 제국이 이슬람의 발흥에 취약스럽게 무너진 것은(동로마는 시리아와 이집트이긴 하지만요;;) 동방기독교도들과 후기 단성론자들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것이라고 봤는데, 그런 면이 실제로 있었나 보군요.;;

    일종의 추측으로만 생각했던 차에, 이렇게 알려주시니 감사드립니다. ^^
  • 소시민 2010/05/22 14:43 #

    들꽃향기님// 그런 측면도 있을듯 합니다. 아래 위장효과님의 덧글을 통해서 좀더 이해를 할수

    있게 됬습니다.

    위장효과님//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이상하게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에서는 그런 내용은

    안나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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