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 역사 청문회 책리뷰

고종황제 역사 청문회고종황제 역사 청문회 - 8점
이태진.김재호 외 9인 지음, 교수신문 기획.엮음/푸른역사

19세기 후반 산업화된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에 맞서야 했고 결국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이런 험난한 시대였기에 그 시기 동안 쭉 재위한 임금 고종의 위기 대처 양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부인과 아버지 사이에 낀 망국을 초래한 무력한 군주라는 부정적인 평과 독립과 개화

의지를 가진 나름 노력을 한 개명군주라는 긍정적인 평을 모두 듣는 고종. 마침 근대사 전공 학자들의 고종에

대한 논쟁을 담은 <고종황제 역사 청문회>라는 책이 있음을 듣고 관심이 생겨 찾아 읽어보게 됬다.

고종의 광무 개혁이 분명히 시행됨으로 이를 통한 성과가 어느정도 나타났으며 민국이념을 계승함으로 고종은

단순한 전제군주가 아닌 개명군주의 성격을 가졌다는 이태진 교수의 주장에 근대화의 싹은 광무 개혁에서

비롯된게 아닌 일제 식민지 시기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고종은 그저 전제 군주일 뿐이라는 식민지 근대화

론자 김재호 교수의 반박이 나옴으로 시작되고 이후 이영훈, 주진오 등 다른 학자들이 참여한 논쟁을 실은

책이다.

교양서적틱한 딱딱하지 않은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은 학자들의 전문적인 견해가 나타난 학술적인 성격이 두드

러지게 드러난다. 읽기에 크게 어렵지는 않지만 학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소화하기 위해서는 <고종시대의 재조

명>,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 같은 논쟁에 참가한 학자들의 저서와 관련 사료 등을 통한 상당한

배경지식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종 시대를 모두 통틀어서 다룬 것이 아닌 대한제국 시기의

재정 운용과 산업 발전 양상,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과연 서구적인 근대 계몽 군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지에 대한 논쟁에 중점을 두어 논쟁이 벌어졌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즉 통사적 성격을 띈 책은 아니다.

논쟁은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지만 양편 학자의 논지 자체는 서로 평행선을 달려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 이따금씩 사료가 좀 더 발굴되어야 입장을 명확히 할수 있다는 서술을 보면 역사 연구에 사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끔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고종의 노력 자체는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고종 시기 서구의 문물 도입 사례들은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에도 소개되는 내용이니...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대한제국 시기의 개혁은 시기상으로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경천동지급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기에 오랬동안 학습기간이 필요할수

있고 청과 같은외세의 간섭과 같은 요인을 무시할 수 없지만 1876년 개항때부터 개화정책이 일관적으로 이루어

졌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생긴다.

대한제국 시기 탁지부 (정부)와 내장원 (황실)로 이원화된 재정 운용 체제는 이태진 교수의 고종의 황실

재산을 통해 적극적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장치라는 평과 김재호 교수의 근대화 정책에 쓰일

예산이 황실의 사치로 전용되었다는 부정적인 평이 엇갈리는데 개인적으로는 이태진 교수의 평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물론 본문에 지적된대로 보다 많은 사료가 발굴되 고종이 황실 재산을 근대화 정책에

중점적으로 투자했다는 주장의 타당성을 따져봐야 겠지만 말이다. 물론 역사 발전 단계상 언젠가는 절대

군주정은 무너져야 겠지만 고종이 자신의 특권을 모두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 급진적으로 실현 가능

성이 적었을 것이다. 지나친 사치는 금물이지만 '즉위 40주년 축하연' 같은 사업은 군주의 권위를 통한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에선 용인할만 하다고 생각할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한 '영웅'의 노력으로만 바뀌는게 아니다. 그에 맞는 제반 조건이 형성되어야 변화가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전반기 천주교와 서학 탄압, 세도 정치 와중에 불거지는 부패와 농민 생활 궁핍등은

참으로 아쉬울수 밖에 없다. 이영훈 교수의 말대로 19세기에도 천주교와 서학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어져

근대 사회에 걸맞는 자생적 사상이 발달했으면 19세기 후반 개화 정책의 사상적 기반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19세기에도 박규수와 최한기 같은 선구자도 있었지만 조정과 전반적인 사상계의

대세는 아니었다. 김재호 교수는 대한제국 시기의 제도는 지대추구적 성격이 너무 강했고 유통을 독점한

수세회사들의 특권이 강해 결과적으로 군소 상인들의 성장을 가로막게 되었다 주장하는데 사실이라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제대로 된 공업 발전 없이 개항이 되 제국주의 열강의 값싼 공산품이 범람한것도 산업

발전에 큰 장해물이 됬을것이다.

앞서 말한것 처럼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역사학계 측은 보다 많은 사료 발굴과 수량경제학적 방법론의 도입

이 필요할테고 사회경제사계열의 식민지근대화론자 측은 자신들의 주장이 자칫 일제의 식민 통치 정당화를 불

러 올수 있고 구한말의 자생적인 근대화 노력에 대해 과소 평가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것이다. 계속된 논쟁을 통해 각 학계로부터 배울건 배우고 수정할건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각이나마 학계의 논쟁이란 이런것이구나라는걸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구한말 역사에 교양 수준을 넘어

학술적인 수준에 입문하고 싶은 독자라면 한 번 쯤 볼만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http://costa.egloos.com2010-03-16T03:24:070.3810

덧글

  • dunkbear 2010/03/16 15:10 # 답글

    김재호 교수 등의 식민지근대화론 지지자들은 설사 더 많은 자료가 나오더라도 자신들의
    입장을 쉽게 바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료의 유무보다는 "근대화"의 정의부터 근본적으
    로 다르게 해석해서 생기는 이슈가 아닌가 해서 말이죠. 잘은 모르지만요.

    개인적으로는 고종 이전에 순조부터 철종까지 60여년에 걸친 혼란이 더 큰 장애였다고
    봅니다. 국가의 토대가 굳건한 상태에서 개항을 해도 될까말까한 근대화였는데 60여년
    간 삼정 문란 등으로 나라가 엉망이 된 상태에서 외세를 이겨내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 소시민 2010/03/17 19:47 #

    그래서 저도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순조도 사리구별

    을 할 수 있는 성년이 될 때 왕위에 오를수 있었을테고 천주교와 서학 같은 신학문에 대한 큰 탄

    압도 일어나지 않아 사상 발전에 활력을 불어 넣을수 있었을것 같습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

    지만요.
  • Mr 스노우 2010/03/16 19:02 # 답글

    당시 왕실의 권위를 적절히 보존하는 안은 분명 필요했을 것입니다. 대원군 개혁도 상당부분 이에 맞춰져 있었지요. 하지만 고종의 패착은 국가 자체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황제의 전제권 강화라는 측면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제까지 왕실이 누려오던 몇몇 특권을 지키는 점을 넘어섰습니다. 사실 조선은 국왕의 전제권을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긴밀히 갖춰진 국가였고, 어떠한 국왕들도 고종이 추구했던 수준의 전제권을 누려보지 못했거든요.

    저도 일전에 블로그에 관련글을 올린적이 있었지만, 고종의 서구문물 도입 노력은 대부분 이 '황제권의 강화'와 직결된 것이었지요. 군제개혁만 해도 전반적인 국방력의 강화보다는 자신의 전제권의 바탕이 될 친위군의 양성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고종과 민씨 일족의 수탈과 부패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이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종 친정기에 백성들 사이에서 대원군을 그리워하는 소리가 높아졌던 것이지요.
  • 소시민 2010/03/17 19:51 #

    당시 고종에게 자신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급진적이라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

    하고 군주 주도화의 근대화 역시 나름의 가능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국가의 부흥보다는 황실의 안위

    에 추가 기울어졌으면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겠군요. 이태진 교수는 지방관의 부패가 두드러지게

    나타난건 사실이다라고 간단히 언급했지만 당시 백성들이 가장 밀접하게 느낄 통치 단위가 이들

    지방관이라는걸 생각하면 결코 간과할수 없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 들꽃향기 2010/03/16 19:50 # 답글

    이태진 선생님과 낙성대 학파(김재호 선생님을 비롯한)의 논쟁자체는 치밀했지만, 사실 이 논쟁의 목표가 '우리사회의 근대화의 동력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라는 함의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태진 선생은 고종시대에 이루어진 근대화를 주목하는 편이고, 낙성대 학파는 우리가 상상하는대로 일제시대를 염두에 두고 있으니깐요.

    하지만 이태진 선생은 이러한 점에서 두 가지 실수를 범했는데,

    ① 고종의 근대화 정책이라는 것이 Mr.스노우님께서 지적하신대로 '공적(公的 Public) 근대국가'를 수립해 간다는 과제 속에서 고종의 이러한 '황제권 강화(특히 사적(私的) 권력 중심의)'가 어떻게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행동이 될 수 있는지를 해명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② 다른 하나는 고종의 그러한 근대화 정책이 '어떠한 일관성과 중심점을 가지고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별다른 해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점을 이태진 선생께서도 모르지는 않으시리라고 봅니다. 사실 '공적 근대국가의 수립'이라는 과제에서 내장원을 대표로 하는 황실의 '사적 수장고'를 확대한 고종의 행동은, ①의 비판의 주요한 근거였고, 이태진 선생께서는 이에 대해서 "공적 재정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사적 재정을 통해 근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는 비교적 미약한 반론을 펴고 계시니 말이죠.

    (하지만 이런 식의 반론은 무의미한게, 광무개혁 시기 국가의 양안사업도 다 마무리 되지 못한 상황에서, 사적인 내장원의 세수확대로 인해 공적 재정은 가뜩이나 쪼들리게 되고, 그로 인하여 공적 정부는 공적 재정의 충원을 위해 일본으로부터의 외채에 의존하게 되어 일본에 더욱 종속되는 모순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조적'인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와중에서, 근대화를 위해 몇 차례 자금출자를 해주었다는 정도로 고종의 내장원 확대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미약한' 성격의 반론이라고 감히 생각하고 싶습니다.)

    더욱이 상식적으로 보아도 고종시기의 10년도 안되는 기간간의 짧은 기억이, 일제 35년보다도 우리사회의 근대화 동력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는 너무나도 힘든 면이 있습니다. 때문에 저 역시 그 책을 읽어보았지만, 기실 이태진 선생의 논리가 미약했다고 총평을 내리고 싶네요.
  • 소시민 2010/03/17 19:58 #

    이태진 교수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이 빛을 발할려고 할때 일제의 조기박멸책으로 무너졌다고

    주장하죠. 아마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이 그대로 계속 추진됬다면 근대 사회 확립을 자력으로 이

    루어냈을거라고 생각하신것 같습니다. 사실 그러기엔 너무 늦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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