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에 나온 몇가지 흥미로운 내용 책에 관한 여러 잡다한 것들

마테오 리치가 활동했던 시기인 16세기 중후반은 프로테스탄트의 성장에 대응하기 위한 로마 카톨릭의 반종교개

혁의 기치가 드셌던 때다. 예수회의 이교도의 논리를 논박하는 사제 훈련 과정, 유대인들에 대한 카톨릭 국가의 

탄압, 포르투갈 세바스티앙 왕의 모로코 원정 등 종교적 열정이 강했던 시기, 하지만 이익을 위해선 종교적 열정과는 

배치되는 행위를 한 사례도 있다. 

... 하지만 16세기 중엽에는 종교적 열정이 외교정책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프랑스는 1544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와 반목하자, 튀르크가 겨울 동안 툴롱항을 정박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즉시 허가했다.

이것은 튀르크 함대가 스페인에 압력을 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1556년 알바 공이 로마와 교황령을 위협

하자 교황 바울로 4세는 프랑스 왕에게 밀사를 보내 튀르크 함대를 부추겨서, 스페인이 지중해에 설치한 군수물자

수송선을 교란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53 ~ 54 P

... 리치의 시대에 사람들은 모두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종교가 다를지라도 타협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타협이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 일도 있다.

예컨데, 포르투갈에서는 이런 사건이 있었다. 포르투갈의 유대인 개종자들은 종교재판소의 가혹한 판결을 받아 

괴멸될 위기에 처하자 해로로 플랑드르와 이탈리아로 자산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즈음 세바스티앙 왕이

타협안을 들고 나왔다. 그의 아프리카 원정에 25만 두카트의 자금을 제공하면 이단에게 부과하는 벌금을 10년간

면제해 주겠다고 한것이다. 1577년, 마침내 유대인은 거래에 응하고 돈을 바쳤다. 하지만 세바스티앙 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약속을 파기해 버렸다. 그들은 세바스티앙 왕은 유대인과 더러운 거래를 했기 때문에 하느

님의 벌을 받아 죽었다고 생각했다.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216 ~ 217P

주경철 교수의 <대항해시대>, <문명과 바다>에서도 나타나듯이 초기 원양항해는 느린 속도와 난파 위험, 물자와

공간 부족 등 힘든 선상 생활 등의 난점이 있었다. 아래 사례는 느린 항해 속도로 인한 대륙간 의사 소통이 어려움

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리치의 장상이었던 발리냐노는 마카오에서 로마로 보낸 편지 한 통이 배달되는 데 무려 17년이나 걸려 깜짝 놀란

적이 있기도 하지만 리치는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는데 보통 6 ~ 7년 정도 걸렸다. 이 정도의 긴 시간이 걸리다

보니 편지를 처음 썼을 때의 상황은 완전히 변해 버린다. 뿐만 아니라 1594년 사오저우에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편지 수취인이 저세상으로 가 버린 일도 있네. 이따금 이미 죽은 사람에게 이곳의 상황에 대해서 그토록

자주 긴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나는 더 이상 무엇을 쓸 힘도 정신도 빠져 버린다네." ...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98P

... 또한 어떤 배는 다른 배들과 고물과 이물에 감아 놓은 밧줄을 서로 캡스턴( 닻 따위의 무거운 물건을 감아 올리는

장치)에 연결하고 조여서 여러 척이 한덩어리가 되어 무서운 바다를 항해하기도 했다 ...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100 P

위 사례는 서양판 연환계인듯? (...)

... 그의 부모는 키에티의 주교였던 조반니 피에트로 카라파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 주교는 뒤에 교황 파울로 4세

가 된 인물이다. 바울로 교황은 발리냐노가 법학 학위를 취둑한 18살 때 그를 대수도원장에 임명했고, 2년 후인 

20살 때는 키에티에 있는 주교좌 성당의 수도참사회원에 앉혔다. 1559년 바울로 교황이 세상을 떠나자 발리냐노는

졸지에 후원자을 잃었다 ...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66P

빽의 힘은 그 당시에도 존재했는듯(...) 후원자인 교황을 잃었을 때는 많은 상심에 빠졌을것이다. 나중에는 어떤 

사람의 얼굴에 칼로 상쳐를 입혀 투옥 생활을 하긴 했지만 예수회에서 열심히 공부해 이후에는 인도양 동쪽의 

예수회를 순시하는 등의 중임을 맡는다.

덧글

  • dunkbear 2009/11/19 11:21 # 답글

    편지 배달에 6-7년이라니... 허허허... ㅡ.ㅡ;;;
  • 소시민 2009/11/20 18:06 #

    원양항해 초창기인걸 감안해도 이건 너무 오래걸려서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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